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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Martial Arts Globe] 약하다고 지기만 하지 않아

  • 조회수
    294
  • 작성일
    2022-12-14
  • 첨부

이소


작가 소개: 쓰고 그리고 수련하는 사람. 인터뷰, 카드뉴스 등 온라인 기반의 텍스트와 이미지 콘텐츠 제작을 업으로 삼는 프리랜서. 개인생활에서는 검도 수련을 하는 생활체육인. 수련 일상을 소재로 글과 그림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도장에서 새 사람을 맞는 문지기 역할을 하지만 사실 낯을 좀 가립니다. (Instagram: @life_kendo)


뉴스에서 코로나 유행을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 순간 이후로 마스크 안 쓰는 일상은 생각할 수 없게 됐죠. 대면회의나 콘서트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가 줄줄히 취소됐고 헬스장 같은 체육시설도 문을 닫았습니다. 제 매일의 저녁시간을 차지하던, 검도도장이 있는 동네 체육센터도 마찬가지였어요. 센터가 다시 열린 건 그로부터 약 1년 반 후의 일입니다.

 

도장이 닫힌 동안 아무 운동도 안 할 순 없었어요.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살이 찌는 건 물론이고 소화불량이나 무기력 등이 덥쳐왔거든요. 살은 모르겠고 몸과 마음에 드러난 증상들을 어떻게든 다스려야겠어서 다른 운동을 조금씩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잘하고 있으니 힘내요!” 달리기 앱에 녹음된 응원의 코칭 목소리를 들으며 동네 하천을 달려봤고요. “고통을 바라보고 지금 여기에 머물러보세요." 사지를 늘리는 동작에 아파서 부르르 떨 때마다 유튜브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요가를 해봤어요. 그 모든 걸 꾸준히 하는 데 실패..! 결국에는 산책과 숨쉬기. 사회적 거리두기 시기에 한 운동은 이게 다예요. 저를 설명할 때 생활체육인이라 말해온 게 무색해졌어요.

 

재개관 공지를 듣고는 오랜만에 검도도장이 있는 체육센터로 향했습니다. 체육센터로 가는 오르막길이 퍽 낯설더라고요. 문을 열고 도장 안으로 들어가니 눈에서 멀어져 잊혔던 관원들이 하나둘 보였어요. 다들 턱에 살이 붙고 배가 나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서로의 몸에 대한 짓궂은 말이 오갔고 곧 수련이 시작됐습니다. 도복 위에 검도 보호구를 입는 내 모습이 낯설었던 건 초보자 시절 이후 처음이었네요.

 

 

오랜만에 들려온 시합 소식

 

그렇게 녹슨 기계를 만지듯 삐걱거리며 수련을 해나가던 때 대회소식을 들었습니다. 코로나 상황 이후 2년 6개월. 아마추어 검도인들의 전국대회인 사회인대회가 열린다는 거예요. “시합이라니, 어떻게 하는 건지 기억도 안 나요.” 저는 시합 소식을 듣고 도장 언니에게 꿍얼댔습니다. 눈앞의 상대를 마주하는 압박. 그 긴장감 속에서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지는 죽도. 과연 2년 6개월의 공백을 깨고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죽도를 쥐며 싸울 수 있을지.

 

관원들은 대부분 시합참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해.” “오랜만에 시합장에 갈려니 귀찮아.” 이런저런 이유로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요. 그 분위기를 비집고 저를 포함한 관원들 몇몇이 시합에 나갔습니다. 원래 사회인검도대회의 단체전 팀 인원은 여성이 3인조이고 남성이 5인조.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열리는 시합인 걸 감안해서였는지, 남성부도 3인조로 인원 수를 줄이는 식으로 대회규정이 느슨해져서 팀을 꾸리기 한결 수월했어요.

 

검도에서의 단체전은 각 팀의 같은 포지션 선수들끼리 1:1 시합을 해서 그 승패 여부로 팀 승부를 가릅니다. 첫번째 선수를 선봉, 두번째 선수를 중견, 마지막 선수를 주장이라 부르는데요. 선봉은 보통 기선제압을 위해 사납게 덤벼드는 선수가, 두번째에는 앞에서 패했을 경우 최소한 실점을 멈춰줄 선수가, 마지막 주장은 그 팀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하는 리더급의 사람이 맡아요.

 

이게 정석이죠, 정석입니다만. 제가 다니는 도장은 여성관원 수가 적습니다. “시합 오더를 어떻게 짜야하나..” 지도사범님의 고민 끝에 가장 호전적인 사람이어야 하는 선봉 자리에 여성관원 중 가장 검도 경력이 낮은, 중년의 초단언니가 나섰습니다. “우리 시합 잘 안 뛰었잖아요. 져도 다 경험이에요.” 언니들에게 시합 나가자고 꼬신 저도 사실은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어요. 전국구 대회, 어쩌면 해당 도장이 속한 지역구나 도시에서 입상경력을 갖고 있을 팀들이 나오는 거니까요. 그들 사이에 끼어든 우리는 어쩌면 다른 팀의 승리를 위한 발판일지도 몰랐어요.

 

아마 1회전 탈락하겠지. 빨리 끝나니까 시합장 근처에서 짜장면이나 먹어야겠다. 속으로 뒷풀이 메뉴를 더 고민했던 거 같아요. 물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체전 시합이 1회전 초고속 탈락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도 사범님도, 저도,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초단언니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시작!” 주임심판의 외침으로 단체전 1회전이 시작됐습니다. 시합장 안으로 성큼 들어가는 초단언니를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해졌어요.

 

“오래 한 사람이다. 경력자야.” 죽도를 뽑아들며 바로 선 상대의 기세에서 중견인 저와, 주장인 4단언니에게 감이 왔습니다. 저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며 머리를 팽팽 돌렸어요. “만약 초단언니가 2대 0으로 지면 그 다음 시합에서 내가 비기거나, 최소한 1:0으로 이겨야 주장의 몫을 좀 덜어줄텐데.” 단체전으로서 이기는 조건에 대한 점수를 계산했지만, 글쎄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팀이 1회전만 하고 집에 갈 줄 알았어요. 10년 넘게 시합에 나가면서 시합의 긴장감을 버텨서 이기거나 비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왔거든요.

 

1회전 시합이 끝났고요. 선봉인 초단언니는 실점하지 않았어요. 누가 봐도 실력 차가 분명한 선수를 상대로 언니의 첫 시합 결과는 ‘비김’이었습니다.

 

그건 생존본능이었을까요.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검도경력 마저 넘어선 거였을까요. "이야아아압!!" 상대가 소리를 지르면 언니 역시 "이야아압!!" 하며 물러서지 않았답니다. 자세는 초단의 그것만큼 어색해도 투지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어요. 시합 시간 3분. 그동안 언니는 시합장 바깥으로 물러서는 장외 실수도 하지 않았고, 서로의 공격이 맞부딪힐 때 밀리지 않았습니다.

 

“언니 화이팅! 도장에서 고단자분들께 맞고 산 세월이 헛되지 않았어!”

 

저는 언니의 시합을 보면서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팀의 누군가가 시합장 안에서 버티고 있다. 저 언니가 저만큼 해내고 있다. 그 모습을 눈으로 본 제 마음에도 일말의 용기가 생겼던가봐요. 그렇게 우리 팀은 전국대회에서 1회전 탈락, 아니 1회전 통과를 했습니다. 중견인 제가 2:0, 주장인 4단 언니도 2:0으로 이겼거든요. 입상경력이 화려한 2회전 상대 팀에게는 무참히 깨졌는데요. 그래도 “이겼어!” 라고 함께 기뻐한 순간이 있었기에 즐거웠습니다.

 

초단언니의 시합은 지금도 제 기억 속의 미스터리입니다. 그날 시합에서 다른 남자부 시합을 구경할 때 유급자에게 패한 고단자를 놀란 눈으로 봤어서 더 그런 건지도요. 시합에서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기겠다는 절실함도 꽤 중요한가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싸움 앞에서는 약자도 강자도 살고 싶은 게 본능. 시합장은 숙련자와 초보자 모두 그 본능을 공평하게 표현하는 자리잖아요. 약자와 강자의 겨루기가 만들어낸 의외의 장면. 그걸 시합장에서 볼 때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한다'는 말에 대한 본보기를 목격한 듯하여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 본 글은 저자 개인의 의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