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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Martial Arts Globe] '여성의 칼'에 대하여

  • 조회수
    161
  • 작성일
    2024-04-25
  • 첨부

‘여성의 칼’에 대하

이  소



작가 소개


쓰고 그리고 수련하는 사람. 인터뷰, 카드뉴스 등 온라인 기반의 텍스트와 이미지 콘텐츠 제작을 업으로 삼는 프리랜서. 개인생활에서는 검도 수련을 하는 생활체육인.

수련 일상을 소재로 글과 그림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도장에서 새 사람을 맞는 문지기 역할을 하지만 사실 낯을 좀 가립니다. (Instagram: @life_kendo)


친구들에게 제가 다니는 검도 도장을 구경시켜줄 때가 있었어요. 잠깐의 저녁약속 후 수련시간에 맞춰 도장으로 향할 때면, 제가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헤어지겠다고 하더라고요. 도복 입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하며 친구들을 데려가곤 했지요. 

“많은 관원들 중에 여자는 언니 혼자더라. 
거기서 언니가 기합 내지르는 모습이 뭉클했어.”

그렇게 도장에 온 친구 한 명이 제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해준 말을 기억합니다. 남성이 대부분인 곳에서 여성으로 지내는 어려움을 헤아려 준 느낌이었거든요. 다행히 지금은 도장에 다른 여성분들이 많아졌고, 수련하는 마음은 좀 더 편해졌습니다. 

왜 도장에 가면 여성이 드물까요? 힘과 기술을 겨루는 무예라서? 흔히 남성은 힘 쎄고 빠르고, 여성은 약하고 느리다고 하잖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여성들 중에도 강하고 빠른 사람이, 뭔가를 돌보는 일만큼이나 싸워 이기는 데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아니면 약하고 느린 사람이라도 무예를 수련하고 싶어할 수 있고요. 회사에 가면 일을 잘 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이들이 어울리듯이요.

여성인 저는 곧잘 궁금해집니다. 왜 도장에 제 동족, 아니 같은 성별이 잘 안 보이는지.

제가 생각하는 이유

몇 가지 이유를 떠올렸습니다.

1. 시설이나 장비가 사용하기에 불편해서
2. 숙련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3. 손에 굳은 살이 배겨서
4. 땀 냄새
5. 비인기 종목이라서

2번부터 5번까지는 성별과 크게 상관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야의 초심자라면 흔히 겪는, 중도하차의 여러 이유 중 하나죠. 1번에 대해서도 고민해봤습니다. 시설? 검도 도장은 누구나 문을 열면 들어갈 수 있는 평범한 장소에요. 나무로 마감된 마룻바닥은 성별에 관계 없이 모두 맨발로 쓰게 돼 있고, 사람 대용으로 공격연습을 하도록 만들어진 타격대 역시 누구든 평등하게 죽도를 휘둘러 때리면 됩니다. 

그렇다면 장비는? 검도 보호구의 경우 개인 맞춤형으로 만들어집니다. 성별이 아니라 신체 사이즈가 중요해요. 도복은 상의가 넉넉하고 하의도 넉넉한 바지 모양. 성별에 상관없이 입기 편해요. 그렇다면 죽도는 어떨까요? 여성이 쥐고 휘두르기에 안 맞는 걸까요? 죽도는 성별과 나이, 키 등 여러 신체조건에 맞춰 길이와 무게가 다양해요. 몸에 맞는 걸 쓰면 되니까 이 또한 성별과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사람’과 ‘말’. 

제가 생각하는, 여성을 도장에서 찾기 어려운 이유는 이 두 가지입니다. 사람 수 자체가 적다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외로워집니다. 수련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말들은 여성 수련자의 몸과 마음의 성장에 어떤 한계가 있다고 느끼게 하고요. “여성이 그 정도면 됐지.” 언젠가 들었던 말의 기억. 아마 그 순간에서 멈췄다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검도 도장의 문을 두드린 여성 초심자가 있다고 상상해볼게요. 

낯선 곳에 가면 그 사실만으로 움츠러들 수 있잖아요. 비슷한 나이대, 혹은 같은 성별의 사람이 있어야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거고요. 나이 차가 많이 나고 다른 성별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낯선 곳에서, 여성이 혼자 인사를 건네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남성분들 입장에서 공감이 어려우시다면, 수련자가 모두 여성인 요가원에 들어간 경우를 상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관장님에게 안내를 받고 무사히 등록을 마쳤어도, 어려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분야의 무예도장 상황도 궁금한데요. 검도 도장의 경우 오랫동안 운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계가 아닌 취미라 해도, 한두해도 아니고 자그마치 10년 넘게 하면 실력이 어느 정도 될까요? 검도 도장에서 대련하는 사람들을 보면 상대방을 타격하는 강력함이 가히 아마추어 선수급. 그런 남성 관원들이 보기에, 열심히 배운다 해도 수련한 지 얼마 안된 여성관원의 실력이란. 어떤 느낌일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기초동작을 익힌 후 검도 호구를 쓰기 시작해도 대련의 재미를 느낄 때까지 꽤 오래 걸립니다. 그동안 초보자는 계속 지죠. 패배를 견디기란 숙련자에게도 어려운 일. 하물며 초보자라면 어떨까요. 상대적으로 힘과 스피드가 약한 몸으로 무예의 세계에 뛰어든 여성이라면요. 실력 차이 때문에 느끼는 막막함의 크기를 가늠하기란 어렵겠지요.

여성으로서 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기기도 합니다. 월경통이죠. 통증의 정도에 따라 늘상 하던 동작도 어느 날은 버겁습니다. 잠깐 1년 반 정도 요가를 배울 때, 선생님이 “월경 중이면 이 동작까지만 따라하세요" 하고 안내하는 모습을 봤어요. 몸 상태에 따라 무리하지 않도록 안내하는 모습이 좋게 다가왔고요. 그때의 경험 이후 여성의 몸을 배려하는 말이 없는 환경에서의 무예수련이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수련한 저의 월경 또한 도장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배가 아플 때 여성친구에게 “월경통 너무 심해" 라고 털어놓으면 마음편할 텐데. 어깨가 떡 벌어진 ‘형’들에게는 어쩐지 입이 안 떨어져요. 괜찮은 척 안 아픈 척을 하다 보면 아픔을 드러내는 용기도, 아픔을 알아채는 감각도 둔해지는 것 같고요. 아플 때는 수련 땡땡이도 방법이겠지만, 야근과 경조사, 과로와 감기 등 수련을 방해하는 여러 결석 이유에 월경까지 추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성의 칼’이라는 말

“여성은 머리치기보다, 손목 아니면 허리로 가야지.”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기억도 납니다. 상대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고 느리니, 몸이 쑥 뛰어들어가 치는 ‘머리치기'보다,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손목’이나 ‘허리’로 승부를 보는 게 낫다는 말들이었죠. 그런 방식이 여성이 써야 할, ‘여성의 칼'이라는 거였어요. ‘여성은 이런 존재이고 이것을 잘 못한다'라는 생각. 그건 정해진 답일까. 언제부터 궁금해지더라고요. 저는 기세가 약한 사람인지라, 상대가 먼저 해오는 공격을 받아내는 공격을 하는 게 더 마음 편했는데요. 언제부턴가 ‘먼저 들어가 쳐라'는, 가까운 선배들의 말에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 부딪혀보기 시작했어요. 매 순간 꽤 겁이 났습니다.

지금의 저는 머리치기 위주로 수련 중입니다. 남자 선배들과 대련할 때도 똑같습니다. 승단심사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칼'보다 ‘먼저 다가가는 칼’로 바꾸려고 무던 애를 썼어요. 머리치기 위주로 수련하면 기세라던가, 투지 같은 부분이 좀더 단련되더군요. 상대가 다가오길 기다리기보다, 먼저 다가가 공격하는 것이니 능동적인 태도나 자신감이 생기고요. 힘도 세어져서는, 대련 도중 몸받음을 할 때 곧잘 상대의 몸을 밀어내기도 합니다. 

‘여성의 칼'이 따로 있을까요. 여성인 제가 해내면 그게 여성의 칼이지 않을까요. 힘과 속도 차이를 부정하지 않아요. 다만 ‘여성의 칼'이라는 말의 바깥으로 나가보고 싶었어요. 애초에 포기하는 것과 계속 시도하고 깨지는 것은 경험해보니 무척 달랐으니까요. 더 강해진 나를 만나는 데 제한을 두고 싶지 않아서, 수련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았어요.

여성으로서 수련하는 데 대한 생각을 말로 꺼내봤는데, 어떠셨나요?

새삼스럽기도 하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번거롭거나, 혹은 미련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해요. 피해의식이 있다는 말을 들을까봐 내심 겁도 납니다. 모두에게는 이해받지 못하겠죠. 그래도 말로 꺼내보았습니다. 여성인 나의 감정, 나의 말이라서요.

어느 순간까지는 도장에 여성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했는데요.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꼭 도장에 여성이 많아야 하나. 세상에 재밌는 게 검도 말고도 얼마나 많은데. 내가 여성친구를 못 찾아 아쉽다면, 여성이 많이 모이는 다른 취미를 가지면 되지, 그런 생각도 해요. 오랜시간 한 분야에 머물면서 마음이 닳았는가 봅니다.

그러다가도 도장 풍경을 보면 확실히 예전보다 여성들이 잘 보입니다. 좋네요. 저보다 더 강해질 여성들이 또 찾아오겠죠. 나이든 제가, 그들에게 안심을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고요. 무엇보다 자신의 몸으로 어떤 동작을 해냈을 때. 그때 느끼게 될 자기확신이 도장뿐만 아니라 삶에서 마주할 여러 어려움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될 거예요. 물론 자기확인이나 효능감을 꼭 무예로 느낄 필요는 없지만, 몸으로 오는 자기확신의 감각은 분명 꽤나 생생할 거라 말해줄 수 있어요. 우리는 생각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삶을 살아내니까요.

어서 오세요. 찾아와, 저를 딛고 강해지시길.

※ 본 글은 저자 개인의 견해입니다.